<포럼>議員입법, ‘페이고’ 첨부 강화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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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덕/서울대 교수·행정학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의 헌법에서 입법은 의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자 의회에만 주어진 고유의 기능으로 명시돼 있다. 이는 행정이 정책결정을 주도하던 절대국가를 극복하고 쟁취해낸 자유주의의 선물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의회의 입법 기능이 제약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애초부터 의회는 국정의 중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 때문에라도 의회가 정책결정과 입법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 규범이 존재한다. 입법과정에서 의원(議員) 발의와 행정부 발의의 상대적 비중을 분석해 그 나라의 의회민주주의 수준을 평가하는 것이 좋은 예다. 실제로 한국에서 ‘유신’과 ‘5공’시대인 제7대에서 제12대까지 국회에서 의원입법(안)이 전체 입법(안)에서 차지한 비중은 다른 시기에 비해 현격하게 낮았다.

1987년 민주주의 이행 이후, 특히 김영삼정부 출범 이후부터 의원 발의 입법안 및 가결된 입법의 비중이 모두 커지기 시작해 과반을 넘어서게 됐다. 이 가운데 실제로는 행정부가 마련한 법안이지만 가결이 쉽도록 하기 위해 의원 발의 형식으로 탈바꿈해 내놓은 경우도 적지는 않다. 그러나 이 또한 국회에서의 가결이 만만찮을 것임을 예상해 행정부가 택하는 전략임을 감안하면 의회의 힘이 그만큼 막강해졌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입법은 합리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입법(안)이 추구하는 목적(이상)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현실) 간의 인과관계(因果關係)가 논리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뒷받침돼야 하는 것이다. 국회가 이러한 정책 분석의 기본이 반영되지 않은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킨다면 국민의 뜻을 제대로 대의(代議)하는 국가기구라고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최근 정치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책법안의 이른바 ‘페이고(Pay As You GO·재원 확보 방안 마련)’ 제도의 도입(문화일보 9월 27일자)은 적잖은 의미가 있다. 법안을 제출할 때 그에 따르는 재정 지출을 뒷받침하기 위한 방안도 의무적으로 첨부하도록 하는 제도가 그것이다. 국회법에 ‘의안을 발의 또는 제안하는 경우에는 그 의안의 시행에 수반될 것으로 예상되는 비용에 대한 추계서를 아울러 제출하여야 한다’(제79조의2)고 명시돼 있으나, 예외 조항 등 때문에 유명무실하다.

따라서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국회에서 의원들이 법안을 좀 더 신중하게 제안하고 가결하게 될 것이다. 제16대 국회에서 전체 의원발의 법안의 가결률은 27.0%였음에 비해, 비용 추계서를 첨부한 법안의 가결률은 19.7%에 그쳤다는 한 연구 결과가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의원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합리적인 정책입법을 하려고만 한다면, 국회 예산정책처와 입법조사처의 전문가들로부터 정책 분석상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우리나라에서도 이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할 만한 현실 정치적인 명분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에 노인들을 위한 기초연금 공약(公約)의 축소 조정 및 그와 관련한 대통령의 사과 발언을 계기로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현재의 국가재정 형편으로는 지난해 있었던 총선과 대선 과정에서 남발된 공약을 실천하기에도 역부족인 모양이다. 게다가 앞으로 간간이 이어질 국회의원 재·보선과 내년 봄 지방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 현실성 낮은 공약들이 또한 무수히 남발될 게 틀림없다. 선거 후에 이 공약들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러잖아도 아시아 최저 수준인 우리 국회와 행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더욱 낮아질 건 분명하다.

건국 이후 뒤늦게나마 역할이 커지고 있는 우리나라 입법부의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라도 이 제도의 도입이 절실하다.